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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직전 나를 구한 '하나님'   테너가수 임웅균③

 

  • 여학생을 사귀고 가끔 땡땡이도 치는 사이에 대학생활이 흘러갔다. 나는 학교에서 다혈질로 통했다. 일을 맡았다 하면 두팔 걷어붙였고 뛰어다녔지만 한번 [아니다]싶으면 그냥 뒤엎어버리는 학생이었다.
  • 그러나 그것도 평화로울 때의 이야기다. 대학교 3학년 오일쇼크와 함께 집안이 풍지박산 났다. 수출길이 막히면서 부도가 났고 집달리들이 몰아닥쳤다. 거기서부터 고난의 세월은 시작된다. 나는 지금도 중소기업의 사장들을 존경한다. 10여년 사업을 하면서 아버지가 겪은 고통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늘 돈 걱정이었고 그 때문에 어머니는 친구나 친척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였다. '중소기업가가 벌면 얼마나 벌겠니. 직원들과 같이 먹고 사는 거란다.'
  • 부도가 났던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침에 우리를불러놓더니 '오늘 부도가 날거다'라고 얘기했다. 아무 대책도 없었다. 집에 있던 돈을 전부 긁어모으니 17만원. 우선 그돈을 들고 아버지는 몸을 피했다. 그날 어머니는 몇시간 동안 계단에 멍하니 앉아계셨다. 아니나 다를까. 빚쟁이와 집달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머니, 형, 동생들도 각자 흩어져서 살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집에 남은 것은 나 혼자였다.
  • 그로부터 경매로 넘어갈 때까지 3개월간 나는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며 혼자서 집을 지켰다. 식구라고는 늙은셰퍼드뿐이었다. 그놈마저 굶어 죽어버렸다. 처음엔 집에 있던 멸치를 먹이고 삼립빵을 사다줬는데 돈이 떨어지니 내가 먹을 음식도 없었다. 한겨울이었지만 난방은 꿈도 못 꾸었다. 낮에는 빚쟁이를 상대하고 밤이면 차가운 바닥에 몸을 누이면서 외로움에 떨어야 했다.
  •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왔다. 어버지는 행방조차 몰랐고 대구에 내려가신 어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지셨다. 집이 처분된 후 문화촌 달동네에 사글세방을 구했다. 그리고 밤무대를 뛰기 시작했다.
  • 클래식을 연주하는 레스토랑이 내 첫직장이었다. 한번은 레스토랑에서 음대 학장과 맞닥뜨렸다. 혼날 각오로인사를 했는데 학장은 꾸지람 대신 내 어깨를 두드려줬다. "임군, 용기를 갖고 열심히 살아" 당시 월급이 12만원. 지금으로 치면 1백만원은 족히 되는 큰 돈이었다. 돈은 어머니 치료비로 송금했다. 그러다보니 물로 배를 채우고 무대에 오르기 일쑤였다. 결국 탈이 났다. 달동네 생활 3개월만에 장티푸스에 걸린 것이다.
  • 돈없이 병에 걸린다는 건 참 기가 막히는 일이다. 박계숙 교수님이 보증을 서줘서 급한 대로 입원을 했지만 침대가 바늘방석이었다. 나중엔 원무과에서 찾아오면 화장실에 들어가 숨곤 했다. 결국 작은 형이 집달리에게 빼앗기지 않았던 대영백과사전을 가져다 팔았다.
  • 겨우 병원비를 해결했는데 얼마 안있어 다시 재발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상태가 심각했다.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하나님을 다시 찾았다. 국민학교 5학년때 목사님으로부터 억울한 오해를 받은 후 "차라리 고무신을 믿겠다."며 버린 하나님이었다.
  • 밤새 기도를 드리며 애원하다 잠이 든 다음날. 내 몸은거짓말처럼 나아 있었다. 그날 나는 내 나머지 삶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했다. 그때의 맹세는 지금까지도 흔들림 없이 지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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